다른사람의 일기를 훔쳐보는 일본의 '피카레스크 갤러리’

도쿄 문화 이색갤러리 2019.09.23
일기장 속 타인의 내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며 안도를 느끼는 곳
도쿄(東京) 시부야(渋谷)구 산구바시(参宮橋)역 인근의 골목을 걷다 보면 주택들 사이로 호젓이 자리한 작은 갤러리를 만나게 된다. ‘피카레스크’라는 이름의 갤러리 한 쪽 구석에는 세상에 드러날 예정이 없었던 타인의 일기와 사적인 메모들을 읽을 수 있는 도서실이 있다. 

“읽고 싶은 일기장을 선택하신 후 종을 울려주세요”
  • 도쿄 시부야 산구바시역 인근 주택가에 위치한 갤러리 ‘피카레스크’에는 타인의 일기를 엿볼 수 있는 도서실이 있다.(사진=최지희기자)
어떤 이에게도 보여줄 생각이 없었던 일기장과 수첩, 메모장들이 투명한 봉투에 담겨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. 만난 적도,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의 손에 그들의 소소한 일상과 고민, 꿈들이 전해진다. 한 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 놓여진 책상에 앉아 타인의 가장 내밀한 사생활 한 페이지를 엿본다.   

1992년 어느 여름날, 한 고등학교 남학생이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떠올리며 쓴 일기는 웃음을 머금게 한다. “아, 오늘도 한 마디도 못하고 지나가버리고 말았다”하고 탄식하며 의기소침해 한 날이 있는가 하면, 수학여행을 가서 함께 찍은 사진을 “내 생애 최고의 보물”이라고 기뻐하며 들뜬 나날들도 있었다. 이후 여학생에게 고백했으나 결국엔 차이고 말았다는 아쉬운 스토리지만, 5권으로 묶인 일기장에는 대학생이 된 이후 그의 일상과 찬란한 연애담들이 이어진다.  

30대 중반의 한 여성은 오랜 기간 해외에서 생활하다 일본으로 돌아왔다.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,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일상이 흘러갔다. 그러던 그녀가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꿈을 가지면서 늦깎이 수험생으로 고군분투 하는 이야기들은, 조금의 과장도 없이 독자에게 전해지며 가슴을 뛰게한다. 
  • 왼편에 보이는 카드 목록에서 읽고 싶은 기록을 골라 은색 종을 울리면 된다. (사진=최지희기자)
60대 남성 사진 작가는 매일 수첩에 그날 장을 본 내역을 십 원 단위까지 꼼꼼하게 메모했다. 생활비를 아껴가며 한달에도 수 차례 이상 각종 전시회를 쫓아다니는 열정은 그의 나이를 무색하게 만든다.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, 붉은 색 볼펜으로 “올 한 해도 무사히 지나갔구나”라고 적은 필치에서, 그가 느낀 안도감이 익숙하게 전달되어 온다. 

부모의 품을 벗어나 도시로 와 직장 생활을 시작한 여성은 히나마츠리(ひな祭り·여자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날)인 3월 3일, 일기장에 “고향집에 아버지가 히나인형(히나마츠리를 축하하기 위해 장식하는 인형)을 꺼내 두셨다고 했다”라고 적었다. 담담한 한 줄의 메모에서, 그녀가 느꼈을 위안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.   

난병을 앓고 있는 어느 이의 투병 일기는 같은 병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소중한 지침서다. 아이와 함께 도서실로 찾아온 어머니는 투병기를 수 시간 째 읽고 또 읽었다.  

이처럼 누군가의 사생활의 기록들을 모으기 시작한 이는 게임 프로그래머 시라도 마사후미(志良堂正史) 씨다. 늘 새로운 무언가를 창작해 내고픈 욕구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게 힌트를 안겨 준 것은 프랑스 문학자 히가시 고지(東宏治)가 자신이 수첩에 남긴 기록들을 모은 펴낸 책 ‘사고(思考)의 수첩’이었다. 책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수첩들을 모아보면 무언가가 발견되지 않을까 생각했다. 
이곳에서 소장 중인 일기들은 모두 1300여권. 기증자들도 늘고 있어 다음 달에는 추가로 200여권이 더 들어올 예정이다. (이미지: ‘수첩류도서실(手帳類図書室)’ 홈페이지)
2014년부터 인터넷상에서 타인의 일기장과 수첩들을 모집한 결과, 지금까지 1300권이 넘는 기록들이 모였다. 다음 달에도 200여 권이 추가로 들어올 예정이다. 

일기장 속 그가 누구이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. 하지만 일기장을 덮은 순간, 내가 느끼는 일상, 내가 고민하는 일들이 그렇게 특별한 것들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. 모르는 사이에 전해져 오는 안도감은 가장 효과적인 위로일 지 모른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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